나는 아버지의 직장 이직과 함께 울산에서 안산으로 이사를 왔다. 처음에는 굉장히 사투리가 심해서 안산 아이들이 놀려대는 통에 초등학교 시절 내내 말이 억세게 나갈까봐 조심하느라 더더욱 말이 없는 아이가 되어 갔다. 존재감없는 통통하고 책만 읽는 아이, 툭하면 조퇴하는 아이였던 것 같다. 말이 없던 나는 중학교에 가서 제법 입을 열게 되었고 공부도 곧 잘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는 교복이 예쁜게 제일이라고 생각해서 또래 친구들과 우정의 징표로 같이 진학을 했고 학교에서 유난히 나를 이뻐하시는 여러 선생님들을 만나게 되어 지금의 교직에까지 들어서게 된 것 같다.
교직에 들어 온 후 오랜 휴직 끝에 복직한 어리버리한 4월의 더운 날이었다. 그날 수업 중에 속보가 떴다. 배가 가라앉았는데, 전원이 구조되었다고. 안심하고 수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오보였고, 그 배는 정말 뒤집힌 채로....
그날 저녁부터 나는 지독한 꿈들에 시달렸다. 실종자 명단에 나의 은사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허허~ 거리시면서 '가영이~'하고 부르시던 목소리, 언제나 매점에서 맛있는 것을 사서 쥐어주시던 분의 이름이었다. '양승진 선생님' 그 다음 날은 남편이 눈물범벅이 되어 퇴근을 했다. 고2때 담임선생님께서 자살하셨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밤새 울었다. 당시 단원고 교감선생님은 남편의 은사님이셨다.
그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 나는 두 아이를 친정엄마께 맡기고 주말마다 단원고로 갔다. 교사들의 일손이 부족하다고 하셨다. 콜센터처럼 전화도 받고, 실종자 명단을 확인하고, 아이들을 찾으면,,, 노제를 지냈다. 마지막 등교길, 출근길에 함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장 강렬했던 기억은 아이들을 잃은 부모님들이 노제를 지내는 선생님들께 화풀이를 하던 모습이었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절망이었고 믿고 보냈던 학교의 수학여행길이 아이의 마지막길이었기에 당연한거라고 생각했다. 미안하고, 죄송했다.. 분노하고, 괴로워했다..
양승진선생님께서는 그날도 아이들이 과자를 사달라고 조르자 한 반 정도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매점에 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 매점에 갔던 아이들은 대다수가 구조되었다고 한다. 양승진 선생님께서는 지병으로 걸음걸이가 좋지 않으셨었는데...배가 쿵하던 순간 튕겨져 나가셨다는 아이의 말을 들었다. 거대한 비통이 흐르던 그 해의 안산, 그리고 단원고, 광화문의 어머님들이 만드시던 리본들. 현재까지도 노란색을 보면 마음이 아리다.
기억하겠습니다. 잊지않겠습니다. 깨어있겠습니다. 라고, 아이들이 빠져나간 교실에 앉아 마음을 추슬러 본다.